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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 이야기31 원하는 것만 얻을 수 있는 인생의 법칙 "인생은 사람이 생각한 것의 결과이다." 이 말은 많은 성공 철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나 역시 인생 경험을 통해 "마음이 부르지 않은 것은 얻을 수 없다." 라는 말을 신념으로 삼고 있다. 즉 이미 실현된 것들은 전부 자신이 마음속으로 원한 것 들이며, 미리 생각하지 않은 것은 이루어질 수도 없다. 다시말해,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소망이 그대로 인생에서 실현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어떤일을 이루고자 한다면 우선 "이렇게 되고 싶다.", "이렇게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것도 누구보다 강렬하고 애절한 열의를 가지고서 바라고 원해야 한다. 그것을 내가 실감한 것은 벌써 40여 년 전,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 辛之助)의 강연을 처음 들..
잡식 이야기30 카르타고 정부는 겨울철 휴전기도 기다리지 않았다. 하밀카르에게 전령을 급히 파견하여, 로마에 강화를 제의하라고 명령했다. 집정관 카툴루스도 하밀카르의 제의에 응했다. 카툴루스와 하밀카르가 동의한 강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에서 철수하고, 시칠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영원히 포기한다. 2. 카르타고는 시라쿠사를 포함한 로마 동맹국들에 대해 싸움을 걸지 않기로 약속한다. 3. 포로는 양국 모두 몸값을 받지 않고 석방한다. 4. 카르타고는 로마에 대한 배상금으로 2천 200탈렌트를 10년 분할로 지불한다. 5. 로마는 카르타고의 자치와 독립을 존중한다. 기원전 264년부터 시작하여 23년 동안 계속된 제 1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41년에 끝났다. 카툴루스는 그해 6월..
잡식 이야기29 용병을 주축으로 한 시라쿠사군은 비록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로마군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금방 격파당하고, 참주 히에론을 앞세워 남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서전에서 성공을 거둔 뒤에도 클라우디우스의 전격작전은 계속 되었다. 하지만 겨울이 닥쳤다. 남국 시칠리아에서도 관습에 따라 겨울에는 휴전에 들어간다. 히에론은 시라쿠사가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고 방어시설도 완벽하기 때문에 쉽사리 함락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시라쿠사가 로마와 싸우는 동안 카르타고가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었다. 히에론이 보낸 강화사절이 로마군 진영을 방문했다. 로마의 두 집정관은 생각지도 않은 수확에 덤벼들었다. 로마 쪽에서 제시한 강화 조건은 간단하고 관대했다. 1. 양국의 동맹관계는 ..
잡식 이야기28 오랫동안 카르타고 세력권이라고 누구나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그리젠토의 함락으로, 로마는 이제 되돌아설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버렸다. 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를 전쟁터로 하여 전개 되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261년, 로마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두 명의 집정관과 4개 군단을 시칠리아로 파견했다. 이해의 로마군은 아그리젠토 공략에 성공한 여세를 몰아 계속 진군하여, 카르타고 세력하의 시칠리아 도시들을 차례로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런 전과는 시칠리아의 내륙지방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해안지방의 도시에는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이 계속되고 있어서, 육지 쪽에서 공격하여 함락시켜도 그것을 계속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카르타고 본국에서의 보급로를 차단하지 않는 한 시칠리아를 제패..
잡식 이야기27 카툴루스는 돛을 내리고 노만 저어서 출동하라고 아군 함대에 명령했다. 서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간 로마 함대는 마레티모를 떠나려 하고 있던 카르타고 함대 앞을 가로 막았다. 이미 전투태세에 들어간 로마 함대를 보고, 카르타고 함대도 돛을 내렸다. 해전은 노젓기만으로 배를 조정하면서 싸우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에, 돛을 내리는 것은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 표시이기도 했다. 서풍은 여전히 강하게 불고 있었다. 돛을 내려도 대형선이기 때문에 강하게 밀린다. 강풍과 높은 파도에 밀린 카르타고 군선들은 동쪽에 진을 친 로마 함대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왔다. 여기저기서 배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격돌로 맞물린 배에서 적선으로 옮겨타고 싸우는 병사들의 함성이 주위를 압도했다. 마키아..
잡식 이야기26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베네치아 귀족 출신이 아니면 원로원 의원에 선출될 수 없었다. 속주의 귀족도, 자국의 평민도, 원로원에 의석을 가질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배타주의는 이 나라 원로원 구성에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로마에서는 원로원조차도 개방적이었다. 베네치아 원로원과 로마 원로원의 두번째 차이점은 베네치아 원로원 의원들이 선거로 선출된 반면에,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선거를 치르지 않았다. 로마 공화정에서는 원로원 의원만 선거를 치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30세만 넘으면 자동적으로 의석을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세습도 아니었다. 상당히 엄격한 선별 작업이 이루어져, 식견과 책임감, 능력과 경험이 모두 합당하다고 인정받은 사람만이 ..
잡식 이야기25 그리스 북부에 있는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는 한니발보다 60년 전에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로마군과 정면 대결을 벌였다. 한니발이 당대의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꼽은 세 사람 가운데 로마군과 전쟁터에서 대결하지 않은 것은 알렉산드로 대왕 한 사람 뿐이었다. 기원전 390년의 '켈트족 충격' 에서 겨우 일어선 로마가 이탈리아 중남부에서 세력을 확립한 시기와 마케도니아의 풍운아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에서 풍운을 일으킨 시기는 거의 일치한다. 로마와 거의 같은 시기에 건국되었지만,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는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건국 초기부터 이들의 함은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번영은 사람들의 정신을 복잡하게 만든다. 로마인한테는 훌륭히 통했던 피로스의 기사도 정신도..
잡식 이야기24 귀족, 즉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를 명쾌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귀족은 클리엔테스를 보호하고, 클리엔테스는 귀족의 보호를 받는다고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귀족의 재정 상태가 나빠지면, 클리엔테스들이 공동으로 귀족을 도왔다. 반대로 클리엔테스 가운데 하나가 경제적 위기에 빠지면 귀족이 도왔다. 훨씬 뒤의 일화이지만,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와 품페이우스의 대결이 막판에 이르렀을 무렵의 일이다. 카이사르가 가장 신뢰하고 있던 보좌관인 라비엔누스가 품페이우스 편에 붙기 위해 카이사르 곁을 떠났다. 8년 동안이나 계속된 갈리아 전쟁에서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라비엔누스는 카이사르가 무장으로서 얼마나 비범한 재능을 지니고 있는가를 가까이에서 보았기 때문에, 카이사르와 품페이..
잡식 이야기23 로마군은 산과 산 사이로 뻗어 있는 샛길을 따라 곧장 서쪽으로 행군했다. 카우디움이라고 불리는 협곡에 이르러, 더 한층 좁아진 입구를 통과하여 골짜기 안으로 들어간 로마군 전위대가 다시 좁은 통로를 지나 골짜기를 막 빠져나가려 했을 때였다. 나무를 쓰러뜨려 만든 바리케이드가 그들의 눈앞을 가로 막았다. 깜짝 놀란 로마군 병사들은 골짜기를 되돌아와 입구로 빠져나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 길도 어느새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도 삼니움족 병사들은 공격해 오지 않았다. 백병전이 벌어졌을 때 로마군 병사들이 얼마나 용맹한지는 그들도 알고 있었다. 집정관의 부관이 삼니움족에 파견되어 화평을 제의했다. 삼니움족도 화평 제의를 받아 들였다. 그들이 내세운 조건은 로마군..
잡식 이야기22 어느 민족이든 전승(傳承)이나 전설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뿌리를 확실히 하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소망일 것이다. 과학적으로 해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은 일이지만, 사람들은 과학적인 해명 따위는 요구하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따르면, 소아시아 서안의 풍요로운 도시 트로이는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그리스군의 공격을 받아 10년 동안이나 계속된 공방전도 드디어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해변에 서 있는 거대한 목마를 발견한 트로이 사람들은 그 목마를 그리스군이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남긴 선물로 오해하고, 10년 동안이나 지켜온 트로이 성 안으로 목마를 끌어들이고 만 것이다. 승리를 눈앞에 두었다고 생각한 트로이 병사들이 깊이 잠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