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외식업구인구직 (39)
음식점구인구직 잡식
◇ 잡식이야기46 갑골문화야말로 동방문명에서 가장 대표적인 문명적 요소이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문명을 문자의 출현 시기로부터 본다. 우리가 갖고 있는 동방문자, 즉 한문은 갑골문자로부터 형성 되었다. 그럼에도 갑골문자의 재발견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것은 1899년에 청나라 국자감 제주(祭主, 지금의 북경대학 총장)인 왕의영이 병 치료 중에 탕재 안의 용골(땅에서 파낸 뼈의 화석)이라는 약재에서 문자를 발견하여 드디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은나라의 역사는 전설로 치부하려던 의고파(擬古派)가 성행하였는데, 갑골문자의 발견으로 은나라의 역사는 진정한 역사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동양 고고학뿐만아니라 세계 고고학의 최대의 개가였다. 이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는 지금까지 믿어왔던..
◇ 잡식이야기45 예스맨을 멀리하고, 아이디어맨을 가까이 하라 뛰어난 경영자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도록 우수한 인재를 선정하는 데 충분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다. 또한 그것을 행하는 동안에는 그들을 간섭하지 않는 자기 절재가 충분한 사람이다. -데어도어 루즈벨트 많은 기업인들이 흔히 범하는 잘못이 있다. 그들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또한 그것을 추구하려는 열정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모든 능력을 소유할 수는 없다. 그들은 권한을 물려 주기는 꺼리면서도 자신이 가장 믿을 만한 지원자를 주위에 둔다. 반면 진실로 영리하고 성공적인 개인들은 높은 수준의 관리자로 영입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재능있는 경영팀은 한 회사가 번영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강력하고 창의적인 사..
◇잡식이야기44 그라쿠스 지지파는 태도가 강경해졌다. 이제 민회에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크레타 출신의 궁수와 마케도니아 출신의 중무장 보병대를 거느리고 행진하는 집정관 오피미우스 뒤에는, 무기를 휴대한 원로원 의원들이 무장한 노예들까지 데리고 따라갔다. 우선 카르타고의 옛터에 세울 예정이었던 '유노 식민지' 건설 계획은 백지화 되었다. 풀라쿠스가 마르세유 남서쪽의 나르본에 추진하고 있던 식민시 건설은 그로부터 3년 뒤인 기원전 118년에 실현되었지만, 카르타고의 옛터와는 달리 나르본의 경우는 속주 에스파냐로 가는 가도의 중계기지라는 군사적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이우스가 식민시 건설에 담은 목적은 경제 진흥에 있었지만, 이같은 구상을 원로원은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
외식업 전문 종합구인구직 사이트 잡식이 지난 7개월동안 "당신의 미래 희망 직종은? 이란 제목의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다음 이었습니다. 전문직 29.71% 서비스직 29.71% 사무직 23.19% 생산직 17.39% 전문적인 지식을 갖거나 직업을 갖고자 하는 것은 높을 것으로 예상을 하였습니다만, 서비스직이 사무직 보다도 높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경제발전의 근간이 되는 생산직은 수치가 낮게 나왔어요. 다음 조사에서는 생산직이 높게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 JOBSIK은 계속하여 충실한 취업정보를 갖추도록 하겠으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직장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 5. 6 잡식 www.jobsik.com
◇ 잡식이야기39 기원전 137년, 26세가 된 티베리우스는 에스파냐에 파견하기로 결정된 군단의 회계감사관(콰이스토로)으로 선임되었다. 나중에 동생 가이우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때 티베리우스는 에스파냐로 가는 길에 토스카나 지방을 지나게 되었는데, 넓은 토지에 자작농들은 보이지 않고 온통 외국에서 끌려온 노예들만이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책임감이 강한 젊은 엘리트를 놀라게 하는 일은 에스파냐에 도착한 뒤에도 끊이지 않았다. 티베리우스가 종군한 군단이 에스파냐에 파견된 것은 40년 만에 일어난 반란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티베리우스의 아버지가 실시한 통치방식은 현지 주민을 고려한 것이었기 때문에 성공했고, 반세기 동안이나 에스파냐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 왔다. 오랫만에 에스파냐..
잡식이야기36 고대의 동방에는 크게 화하족(華夏族)과 동이족(東夷族)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한족(漢族, 중화족)과 한족(韓族. 조선족)으로 대표되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같은 민족끼리 어떤 상징적인 동물을 숭상하는 토템 (totem)을 가졌는데, 화하족인 중국 민족은 용(龍)을 토템으로 삼았고, 동이족인 한민족은 새(조(鳥))를 토템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 민족은 모두 용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는데 용은 곧, 중국 민족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황하문명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는 동방 최고의 용의 형상이 화하족의 본향인 황하유역의 중원(中原) 지방을 크게 벗어난 지점인 바로 발해연안 북부의 대릉하 유역과 서요하 유역에서 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잡식 이야기3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 역사학계는 현재의 지정학적(地政學的)인 이점을 이용하여 엄연한 우리나라 역사인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그들의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런 와중에서도 북한의 역사학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부분은 무어라 해도 고구려사와 발해사 연구다. 그것은 지리적인 위치에서 뿐만 아니라 그곳에 정통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도 없지 않다. 이것은 남한의 신라사 연구열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와 같은 남북한 역사학계의 대립 현상은 연구 인력과 연구 성과가 신라사나 고구려사 어느 한쪽에 편중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고려 때 일연의 '삼국유사' 왕력(王曆)편 고구려 제1대 동명왕조에는 "갑신년(기원전37)에 즉위하여, 치세는 18년간이..
잡식 이야기29 용병을 주축으로 한 시라쿠사군은 비록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로마군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금방 격파당하고, 참주 히에론을 앞세워 남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서전에서 성공을 거둔 뒤에도 클라우디우스의 전격작전은 계속 되었다. 하지만 겨울이 닥쳤다. 남국 시칠리아에서도 관습에 따라 겨울에는 휴전에 들어간다. 히에론은 시라쿠사가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고 방어시설도 완벽하기 때문에 쉽사리 함락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시라쿠사가 로마와 싸우는 동안 카르타고가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었다. 히에론이 보낸 강화사절이 로마군 진영을 방문했다. 로마의 두 집정관은 생각지도 않은 수확에 덤벼들었다. 로마 쪽에서 제시한 강화 조건은 간단하고 관대했다. 1. 양국의 동맹관계는 ..
잡식 이야기28 오랫동안 카르타고 세력권이라고 누구나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그리젠토의 함락으로, 로마는 이제 되돌아설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버렸다. 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를 전쟁터로 하여 전개 되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261년, 로마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두 명의 집정관과 4개 군단을 시칠리아로 파견했다. 이해의 로마군은 아그리젠토 공략에 성공한 여세를 몰아 계속 진군하여, 카르타고 세력하의 시칠리아 도시들을 차례로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런 전과는 시칠리아의 내륙지방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해안지방의 도시에는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이 계속되고 있어서, 육지 쪽에서 공격하여 함락시켜도 그것을 계속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카르타고 본국에서의 보급로를 차단하지 않는 한 시칠리아를 제패..
잡식 이야기25 그리스 북부에 있는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는 한니발보다 60년 전에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로마군과 정면 대결을 벌였다. 한니발이 당대의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꼽은 세 사람 가운데 로마군과 전쟁터에서 대결하지 않은 것은 알렉산드로 대왕 한 사람 뿐이었다. 기원전 390년의 '켈트족 충격' 에서 겨우 일어선 로마가 이탈리아 중남부에서 세력을 확립한 시기와 마케도니아의 풍운아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에서 풍운을 일으킨 시기는 거의 일치한다. 로마와 거의 같은 시기에 건국되었지만,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는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건국 초기부터 이들의 함은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번영은 사람들의 정신을 복잡하게 만든다. 로마인한테는 훌륭히 통했던 피로스의 기사도 정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