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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식이야기42 형 티베리우스가 30세에 원통하게 죽은 기원전 133년, 에스파냐에 파견된 군단에 종군하느라 로마에 없었던 동생 가이우스는 아직 21세에 불과했다. 그는 이듬해에 귀국하여 형이 남긴 '3인 위원회'의 일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지만, 강력한 의지와 정열의 뒷받침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억제된 형태로 드러냈던 형과는 달리, 가이우스는 그것을 그대로 표면에 분출해 버리는 성격이었지만, 준비를 충분히 하고 기다릴 줄은 알고 있었다. 가이우스는 기원전 126년부터 3년동안 사르데냐에 파견된 군단에서 회계감사관으로 근무했다. 그때의 에피소드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또 한번은 군량인 밀이 부족했다. 사르데냐 섬은 전통적으로 밀 산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밀을 현지 조달하려면 섬 주민들의 식량을 징..
◇ 잡식이야기41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으로 손해를 보는 원로원 의원들의 반대는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었다. 개혁에는 찬성하지만 원로원 주도의 과두정 체제를 무너뜨릴 마음이 없는 그들의 반대에도 이 무렵에는 명백해졌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재선되어 자기 개인에 대한 권력 집중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 반대파가 내건 기치였다.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이루어진 일도 사리사욕 때문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은 어제 오늘 시작된 일이 아니다. 투표장을 가득 메운 유권자들은 평민집회가 열리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도착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열광적인 환호로 맞이했다. 하지만 그라쿠스에 표를 던지려고 예년보다 많은 시민이 모인 것이 뜻하지 않는 사태를 낳았다. 원로원 의원인 풀비우스 플라쿠스의 보고에 따르면, 반대파..
◇ 잡식이야기40 기원전 134년 여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출마하여 당선 되었다. 특유의 조용하고 감정을 억제한 말투를 썼는데, 젊은 호민관의 연설은 로마 시민들의 가슴을 깊이 파고 들었다. 호민관 임기는 12월 10일에 시작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그보다 앞서 농지개혁 법안을 제출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생각은 확고부동했다. 농민에서 무산자로 전락한 이들에게 농지라는 재산을 주어 자작농에 복귀시킴으로써 로마 시민층의 기반을 건전하게 하고, 실업자를 구제하는 동시에 사회 불안을 해소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시민층의 건전화만 이루어지면,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 구성되는 로마 군단도 다시금 양적, 질적으로 향상하여 원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농지를 분배하는 것만으로는 자작..
◇ 잡식이야기39 기원전 137년, 26세가 된 티베리우스는 에스파냐에 파견하기로 결정된 군단의 회계감사관(콰이스토로)으로 선임되었다. 나중에 동생 가이우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때 티베리우스는 에스파냐로 가는 길에 토스카나 지방을 지나게 되었는데, 넓은 토지에 자작농들은 보이지 않고 온통 외국에서 끌려온 노예들만이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책임감이 강한 젊은 엘리트를 놀라게 하는 일은 에스파냐에 도착한 뒤에도 끊이지 않았다. 티베리우스가 종군한 군단이 에스파냐에 파견된 것은 40년 만에 일어난 반란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티베리우스의 아버지가 실시한 통치방식은 현지 주민을 고려한 것이었기 때문에 성공했고, 반세기 동안이나 에스파냐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 왔다. 오랫만에 에스파냐..
◇ 잡식이야기38 서양에는 은수저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이 있다. 아쉬울 것 없는 혜택받은 환경에서 태어났음을 뜻하는 표현이다. 역사상 '그라쿠스 형제' 로 유명한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야말로 기원전 2세기 후반의 로마에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 표현이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다. 아버지 그라쿠스와 아내 코르넬리아와의 사이에 자식을 12명이나 낳았지만, 유아 사망률이 높은 시대였다.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수라는 두 아들과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시집간 딸 하나뿐이었다.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의 양육은 어머니 코르넬리아의 세심한 배려 속에 이루어졌다. 코르넬리아 자신도 당시 로마 교양인의 자격인 그리스어를 읽고 말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진 두 개의 보석' 이라고 부른 두 아들의 가정교사로..
잡식이야기37 전쟁이 끝난 뒤에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장래는 결정된다. 승패는 이미 판가름났으니까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문제는 거기서 얻은 경험을 어떻게 살리느냐다. 후세에 살고 있는 우리는 기원전 241년에 끝난 제1차 포에니 전쟁과 기원전 218년에 일어난 제2차 포에니 전쟁 사이에 23년의 세월이 막간 처럼 놓여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이 23년을 로마인과 카르타고인은 각각 어떻게 사용했느냐가 문제다. 이 23년은 모든 로마인과 대다수 카르타고인에게는 휴전 기간이 아니었다. 로마인도, 극소수를 제외한 카르타고인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전쟁이 또다시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밀카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 6년을 용감히 싸웠지만, 해군이 해전에서 패했기 때문에 강..
잡식이야기36 고대의 동방에는 크게 화하족(華夏族)과 동이족(東夷族)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한족(漢族, 중화족)과 한족(韓族. 조선족)으로 대표되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같은 민족끼리 어떤 상징적인 동물을 숭상하는 토템 (totem)을 가졌는데, 화하족인 중국 민족은 용(龍)을 토템으로 삼았고, 동이족인 한민족은 새(조(鳥))를 토템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 민족은 모두 용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는데 용은 곧, 중국 민족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황하문명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는 동방 최고의 용의 형상이 화하족의 본향인 황하유역의 중원(中原) 지방을 크게 벗어난 지점인 바로 발해연안 북부의 대릉하 유역과 서요하 유역에서 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잡식 이야기33 인류의 역사는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이어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문명' 이라는 어휘는 신석기시대 문화로부터 불리워진다. 신석기시대는 인류의 발달사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적 발명을 하게 되는 시기다. 그것이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흔히 동방에서의 시원적인 문명을 '황하문명' 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저자는 황하문명의 발상지가 발해를 중심으로 황하 하류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발해연안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늘 시사해왔었다. 여기에서 발해연안이라 함은 지정학적인 위치가 아니라 문화적인 범위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발해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중국의 태행산(太行山)이동 하북성(河北省) 일대와 하남성(河南省) 동북부 일부, 남쪽으로는 산동반도, 북쪽으로는 대흥안령(大興安嶺) 이남 요녕성(遼寧省) 일대,..
안녕하세요. 한식맛집 입니다. 한식의 세계경영이 2013년 1월 12일 부터 한식맛집으로 바뀌었습니다. 단지 카페이름만 바뀌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기존과 동일합니다. 그동안 한식의 세계경영 이라는 카페명을 사랑해준 회원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이름을 바꾼 이유는 보다 회원님들께 좋고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입니다. 맛집과 요리에 다가가기 위해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랑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여전히 한식맛집에는 맛집정보, 요리정보, 여행정보, 패션정보, 뷰티정보가 있습니다. 회원님들께는 예전에 의견을 구하였으나, 제대로 의견 수렴이 되지를 못하였고, 간간이 한식의 세계경영이라는 카페이름이 좋다는 의견도 많았었습니다. 한식맛집을 잘 이용하셔서 건강한 삶이 되었으면..
잡식 이야기32 서한 고조 유방은 5년간의 전쟁 끝에 강적 항우를 물리치고 튼튼한 왕조를 세웠다. 그런데 그 직후 논공행상에서 군신은 서로 공을 다투며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고조는 공로가 제일 큰 소하를 제후에 봉하고 영지도 가장 많이 내렸다. 그러자 일부 무장들이 들고 일어섰다. "소신들의 공로는 모두 목숨과 맞바꾼 것입니다. 소신들은 견고한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각지를 전전하며 용감하게 싸웠 습니다. 많게는 백여 번, 적게는 몇 십 번의 전투를 치렀습니다. 전투의 공로는 서로 크고 작음이 있지만, 모두 이바지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소하는 어떻습니까? 그가 전장에서 세운 공로가 있습니까? 그저 입이나 놀리고 글줄이나 쓸 줄 알았지 단 한번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