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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식맛집 네이버 카페 입니다. 금번 우리 카페에서 회원님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서비스를 실시합니다. 많이들 참여하시어 좋은 성과들 있으시길 바랍니다. 1. 내 용 : 한식맛집 카페 메인에 바로가기 게재 해드립니다 http://cafe.naver.com/jobsik 2. 자 격 : 한식맛집 회원이며, 꾸준한 활동회원 우대함. 3. 바로가기 대상 : 사이트, 쇼핑몰, 맛집홈페이지 홍보 문구 넣어 주시고, url 즉 주소를 알려 주세요. 한식맛집 카페에 성격에 맞는 것 위주 입니다. 글자수는 뛰어쓰기, 바로가기 글자 포함하여 19자 이내로 해주세요. 블러그, 카페도 좋습니다. 4. 참여방법 : 한식맛집 공고사항(현재글) 덧글로 작성해 주거나,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홍보문구를 글자수(19자)에 맞..
◇ 잡식이야기43 한 조직의 성원들이 서로 흠 잡기에 몰두해 '집안싸움'의 기미를 보이면 그 조직의 응집력은 와해되고 만다. 그래서 리더는 '일단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않는다' 라는 원칙을 고수하며 쓸데없는 소리를 멀리하고 부하들이 마음 놓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역대 왕 중 많은 이들이 부하들의 다툼을 용인하여 국가의 내부 조직이 산산이 부서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광무제는 이런 폐단을 알고 자신을 단속했다. 일단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않았고, 의심가는 사람은 처음부터 쓰지 않았다. 또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좋지 않은 풍조의 발생을 막아 조정의 안정을 확보했다. 본래 영천 출신인 풍이는 왕망 말년에 유수에게 투항하여 주부가 되었다. 일찍이 유수가 하북의 난리를 평정하고 민심을 안정..
◇ 잡식이야기42 형 티베리우스가 30세에 원통하게 죽은 기원전 133년, 에스파냐에 파견된 군단에 종군하느라 로마에 없었던 동생 가이우스는 아직 21세에 불과했다. 그는 이듬해에 귀국하여 형이 남긴 '3인 위원회'의 일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지만, 강력한 의지와 정열의 뒷받침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억제된 형태로 드러냈던 형과는 달리, 가이우스는 그것을 그대로 표면에 분출해 버리는 성격이었지만, 준비를 충분히 하고 기다릴 줄은 알고 있었다. 가이우스는 기원전 126년부터 3년동안 사르데냐에 파견된 군단에서 회계감사관으로 근무했다. 그때의 에피소드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또 한번은 군량인 밀이 부족했다. 사르데냐 섬은 전통적으로 밀 산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밀을 현지 조달하려면 섬 주민들의 식량을 징..
◇ 잡식이야기41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으로 손해를 보는 원로원 의원들의 반대는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었다. 개혁에는 찬성하지만 원로원 주도의 과두정 체제를 무너뜨릴 마음이 없는 그들의 반대에도 이 무렵에는 명백해졌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재선되어 자기 개인에 대한 권력 집중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 반대파가 내건 기치였다.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이루어진 일도 사리사욕 때문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은 어제 오늘 시작된 일이 아니다. 투표장을 가득 메운 유권자들은 평민집회가 열리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도착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열광적인 환호로 맞이했다. 하지만 그라쿠스에 표를 던지려고 예년보다 많은 시민이 모인 것이 뜻하지 않는 사태를 낳았다. 원로원 의원인 풀비우스 플라쿠스의 보고에 따르면, 반대파..
◇ 잡식이야기40 기원전 134년 여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출마하여 당선 되었다. 특유의 조용하고 감정을 억제한 말투를 썼는데, 젊은 호민관의 연설은 로마 시민들의 가슴을 깊이 파고 들었다. 호민관 임기는 12월 10일에 시작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그보다 앞서 농지개혁 법안을 제출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생각은 확고부동했다. 농민에서 무산자로 전락한 이들에게 농지라는 재산을 주어 자작농에 복귀시킴으로써 로마 시민층의 기반을 건전하게 하고, 실업자를 구제하는 동시에 사회 불안을 해소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시민층의 건전화만 이루어지면,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 구성되는 로마 군단도 다시금 양적, 질적으로 향상하여 원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농지를 분배하는 것만으로는 자작..
잡식이야기37 전쟁이 끝난 뒤에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장래는 결정된다. 승패는 이미 판가름났으니까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문제는 거기서 얻은 경험을 어떻게 살리느냐다. 후세에 살고 있는 우리는 기원전 241년에 끝난 제1차 포에니 전쟁과 기원전 218년에 일어난 제2차 포에니 전쟁 사이에 23년의 세월이 막간 처럼 놓여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이 23년을 로마인과 카르타고인은 각각 어떻게 사용했느냐가 문제다. 이 23년은 모든 로마인과 대다수 카르타고인에게는 휴전 기간이 아니었다. 로마인도, 극소수를 제외한 카르타고인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전쟁이 또다시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밀카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 6년을 용감히 싸웠지만, 해군이 해전에서 패했기 때문에 강..
잡식 이야기33 인류의 역사는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이어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문명' 이라는 어휘는 신석기시대 문화로부터 불리워진다. 신석기시대는 인류의 발달사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적 발명을 하게 되는 시기다. 그것이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흔히 동방에서의 시원적인 문명을 '황하문명' 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저자는 황하문명의 발상지가 발해를 중심으로 황하 하류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발해연안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늘 시사해왔었다. 여기에서 발해연안이라 함은 지정학적인 위치가 아니라 문화적인 범위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발해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중국의 태행산(太行山)이동 하북성(河北省) 일대와 하남성(河南省) 동북부 일부, 남쪽으로는 산동반도, 북쪽으로는 대흥안령(大興安嶺) 이남 요녕성(遼寧省) 일대,..
잡식 이야기32 서한 고조 유방은 5년간의 전쟁 끝에 강적 항우를 물리치고 튼튼한 왕조를 세웠다. 그런데 그 직후 논공행상에서 군신은 서로 공을 다투며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고조는 공로가 제일 큰 소하를 제후에 봉하고 영지도 가장 많이 내렸다. 그러자 일부 무장들이 들고 일어섰다. "소신들의 공로는 모두 목숨과 맞바꾼 것입니다. 소신들은 견고한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각지를 전전하며 용감하게 싸웠 습니다. 많게는 백여 번, 적게는 몇 십 번의 전투를 치렀습니다. 전투의 공로는 서로 크고 작음이 있지만, 모두 이바지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소하는 어떻습니까? 그가 전장에서 세운 공로가 있습니까? 그저 입이나 놀리고 글줄이나 쓸 줄 알았지 단 한번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잡식 이야기30 카르타고 정부는 겨울철 휴전기도 기다리지 않았다. 하밀카르에게 전령을 급히 파견하여, 로마에 강화를 제의하라고 명령했다. 집정관 카툴루스도 하밀카르의 제의에 응했다. 카툴루스와 하밀카르가 동의한 강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에서 철수하고, 시칠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영원히 포기한다. 2. 카르타고는 시라쿠사를 포함한 로마 동맹국들에 대해 싸움을 걸지 않기로 약속한다. 3. 포로는 양국 모두 몸값을 받지 않고 석방한다. 4. 카르타고는 로마에 대한 배상금으로 2천 200탈렌트를 10년 분할로 지불한다. 5. 로마는 카르타고의 자치와 독립을 존중한다. 기원전 264년부터 시작하여 23년 동안 계속된 제 1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41년에 끝났다. 카툴루스는 그해 6월..
잡식 이야기29 용병을 주축으로 한 시라쿠사군은 비록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로마군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금방 격파당하고, 참주 히에론을 앞세워 남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서전에서 성공을 거둔 뒤에도 클라우디우스의 전격작전은 계속 되었다. 하지만 겨울이 닥쳤다. 남국 시칠리아에서도 관습에 따라 겨울에는 휴전에 들어간다. 히에론은 시라쿠사가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고 방어시설도 완벽하기 때문에 쉽사리 함락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시라쿠사가 로마와 싸우는 동안 카르타고가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었다. 히에론이 보낸 강화사절이 로마군 진영을 방문했다. 로마의 두 집정관은 생각지도 않은 수확에 덤벼들었다. 로마 쪽에서 제시한 강화 조건은 간단하고 관대했다. 1. 양국의 동맹관계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