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외식업잡 잡식 (185)
음식점구인구직 잡식
◇ 잡식이야기40 기원전 134년 여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출마하여 당선 되었다. 특유의 조용하고 감정을 억제한 말투를 썼는데, 젊은 호민관의 연설은 로마 시민들의 가슴을 깊이 파고 들었다. 호민관 임기는 12월 10일에 시작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그보다 앞서 농지개혁 법안을 제출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생각은 확고부동했다. 농민에서 무산자로 전락한 이들에게 농지라는 재산을 주어 자작농에 복귀시킴으로써 로마 시민층의 기반을 건전하게 하고, 실업자를 구제하는 동시에 사회 불안을 해소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시민층의 건전화만 이루어지면,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 구성되는 로마 군단도 다시금 양적, 질적으로 향상하여 원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농지를 분배하는 것만으로는 자작..
외식업 전문 종합구인구직 사이트 잡식이 지난 7개월동안 "당신의 미래 희망 직종은? 이란 제목의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다음 이었습니다. 전문직 29.71% 서비스직 29.71% 사무직 23.19% 생산직 17.39% 전문적인 지식을 갖거나 직업을 갖고자 하는 것은 높을 것으로 예상을 하였습니다만, 서비스직이 사무직 보다도 높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경제발전의 근간이 되는 생산직은 수치가 낮게 나왔어요. 다음 조사에서는 생산직이 높게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 JOBSIK은 계속하여 충실한 취업정보를 갖추도록 하겠으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직장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 5. 6 잡식 www.jobsik.com
◇ 잡식이야기39 기원전 137년, 26세가 된 티베리우스는 에스파냐에 파견하기로 결정된 군단의 회계감사관(콰이스토로)으로 선임되었다. 나중에 동생 가이우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때 티베리우스는 에스파냐로 가는 길에 토스카나 지방을 지나게 되었는데, 넓은 토지에 자작농들은 보이지 않고 온통 외국에서 끌려온 노예들만이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책임감이 강한 젊은 엘리트를 놀라게 하는 일은 에스파냐에 도착한 뒤에도 끊이지 않았다. 티베리우스가 종군한 군단이 에스파냐에 파견된 것은 40년 만에 일어난 반란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티베리우스의 아버지가 실시한 통치방식은 현지 주민을 고려한 것이었기 때문에 성공했고, 반세기 동안이나 에스파냐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 왔다. 오랫만에 에스파냐..
◇ 잡식이야기38 서양에는 은수저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이 있다. 아쉬울 것 없는 혜택받은 환경에서 태어났음을 뜻하는 표현이다. 역사상 '그라쿠스 형제' 로 유명한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야말로 기원전 2세기 후반의 로마에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 표현이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다. 아버지 그라쿠스와 아내 코르넬리아와의 사이에 자식을 12명이나 낳았지만, 유아 사망률이 높은 시대였다.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수라는 두 아들과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시집간 딸 하나뿐이었다.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의 양육은 어머니 코르넬리아의 세심한 배려 속에 이루어졌다. 코르넬리아 자신도 당시 로마 교양인의 자격인 그리스어를 읽고 말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진 두 개의 보석' 이라고 부른 두 아들의 가정교사로..
잡식이야기37 전쟁이 끝난 뒤에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장래는 결정된다. 승패는 이미 판가름났으니까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문제는 거기서 얻은 경험을 어떻게 살리느냐다. 후세에 살고 있는 우리는 기원전 241년에 끝난 제1차 포에니 전쟁과 기원전 218년에 일어난 제2차 포에니 전쟁 사이에 23년의 세월이 막간 처럼 놓여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이 23년을 로마인과 카르타고인은 각각 어떻게 사용했느냐가 문제다. 이 23년은 모든 로마인과 대다수 카르타고인에게는 휴전 기간이 아니었다. 로마인도, 극소수를 제외한 카르타고인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전쟁이 또다시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밀카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 6년을 용감히 싸웠지만, 해군이 해전에서 패했기 때문에 강..
잡식이야기36 고대의 동방에는 크게 화하족(華夏族)과 동이족(東夷族)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한족(漢族, 중화족)과 한족(韓族. 조선족)으로 대표되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같은 민족끼리 어떤 상징적인 동물을 숭상하는 토템 (totem)을 가졌는데, 화하족인 중국 민족은 용(龍)을 토템으로 삼았고, 동이족인 한민족은 새(조(鳥))를 토템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 민족은 모두 용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는데 용은 곧, 중국 민족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황하문명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는 동방 최고의 용의 형상이 화하족의 본향인 황하유역의 중원(中原) 지방을 크게 벗어난 지점인 바로 발해연안 북부의 대릉하 유역과 서요하 유역에서 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잡식 이야기35 요동반도 묘후산 동굴유적은 1978년 묘후산 남록 석회암 채석장에서 발견된 이래 요녕성박물관과 본계시박물관 팀에 의해서 3년간에 걸쳐 발굴되어, 1986년에 '묘후산' 이란 보고서가 발간 되었다. 묘후산 유적 에서는 곧선사람 이른바 직립원인(Homo erectus) 단계의 견치(犬齒) 화석 1과와 이보다 한 단계 뒤의 이른바 슬기사람(智人)인 고인(古人, Home sapiens) 단계의 어금니 화석 1개와 팔뼈 화석 한 토막이 발견 되었다. 직립원인 단계의 견치 화석이 출토된 동일 퇴적층의 우라늄함 량년대측정 결과 24만 7000년이라는 하는 연대치가 나왔다. 이것은 동북아시아 고인류화석 중에서 가장 빠른 시기의 유적 중 하나이다. 광개토대왕 시대의 고구려는 당시 동북아에서는 최대의 국가..
잡식 이야기3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 역사학계는 현재의 지정학적(地政學的)인 이점을 이용하여 엄연한 우리나라 역사인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그들의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런 와중에서도 북한의 역사학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부분은 무어라 해도 고구려사와 발해사 연구다. 그것은 지리적인 위치에서 뿐만 아니라 그곳에 정통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도 없지 않다. 이것은 남한의 신라사 연구열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와 같은 남북한 역사학계의 대립 현상은 연구 인력과 연구 성과가 신라사나 고구려사 어느 한쪽에 편중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고려 때 일연의 '삼국유사' 왕력(王曆)편 고구려 제1대 동명왕조에는 "갑신년(기원전37)에 즉위하여, 치세는 18년간이..
잡식 이야기33 인류의 역사는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이어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문명' 이라는 어휘는 신석기시대 문화로부터 불리워진다. 신석기시대는 인류의 발달사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적 발명을 하게 되는 시기다. 그것이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흔히 동방에서의 시원적인 문명을 '황하문명' 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저자는 황하문명의 발상지가 발해를 중심으로 황하 하류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발해연안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늘 시사해왔었다. 여기에서 발해연안이라 함은 지정학적인 위치가 아니라 문화적인 범위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발해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중국의 태행산(太行山)이동 하북성(河北省) 일대와 하남성(河南省) 동북부 일부, 남쪽으로는 산동반도, 북쪽으로는 대흥안령(大興安嶺) 이남 요녕성(遼寧省) 일대,..
잡식 이야기32 서한 고조 유방은 5년간의 전쟁 끝에 강적 항우를 물리치고 튼튼한 왕조를 세웠다. 그런데 그 직후 논공행상에서 군신은 서로 공을 다투며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고조는 공로가 제일 큰 소하를 제후에 봉하고 영지도 가장 많이 내렸다. 그러자 일부 무장들이 들고 일어섰다. "소신들의 공로는 모두 목숨과 맞바꾼 것입니다. 소신들은 견고한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각지를 전전하며 용감하게 싸웠 습니다. 많게는 백여 번, 적게는 몇 십 번의 전투를 치렀습니다. 전투의 공로는 서로 크고 작음이 있지만, 모두 이바지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소하는 어떻습니까? 그가 전장에서 세운 공로가 있습니까? 그저 입이나 놀리고 글줄이나 쓸 줄 알았지 단 한번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의..